아래 '연주'가 의미를 지니려면 언제나 항상 즉흥성이 소리의 조합을 지배해야 한다. 만약 아래 유형의 연주가 기존에 만들어진 패턴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라면 그저 기존의 녹음을 틀어놓는 편이 더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러한 경우 해당 '연주'는 쉽게 말해서 '뻘짓'이 된다. 달리 말하면, 재즈 음악이 필요로 하는 즉흥성과 같은 것이 이 패턴 조합 음악에도 흐르고 있어야 한다. 아울러 연주자 앞의 저 기계들이 사실은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새 조합을 소리로 변환하기 위한 장치로서 불필요하게 객관적 물상의 형태로 외화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지 싶다. 관련하여 사실 이러한 소리의 조합이 '음악'의 영역에 들지 않는다는 점을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전-화성악'의 영역에 머문다는 점에서 '전-음악'(pre-music)이라고 부름직하다. 이는 오늘날 철학에 있어서 들뢰즈적 경향과 매우 잘 부합하는 음악적 현상이다. 피히테의 전주관적 의식(pre-subjective consciousness)을 생명의 절대적 내재성으로 설명하는 들뢰즈를 떠올려보라. 그것이 바로 아래 연주를 관통하는 '즉흥적 삶'의 전주관적 양상이지 않은가? 어째서 '전주관적'인가? 예컨대, 아래 음들의 조합을 과학화된 악보의 형태로 옮기는 일의 '멍청함'을 생각해보라. 어찌하여 우리는 음악을 악보에 옮겨 적어야한다고 여기는가? 그것은 기본적으로 음악이 학습의 대상이라는 뜻이지 않은가? 모차르트의 곡을 연습하는 음악 대학 입시준비생을 생각해보라.입시를 위해 곡을 공부하고 연습할 때 그는 모차르트를 음악의 모범을 담아내고 있는 일종의 완성된 자연으로 대하고 있다. 그렇다면 알프레드 브랜들과 같은 대가들이 모차르트의 곡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들의 연주는 그 자체 각각 독특한 존재를 창출해내지 않던가? 그러나 동일 음악을 달리 연주한 다양한 연주자들의 음반을 수집할 때 사실 우리가 은밀히 느끼는 것은 그 모든 '차이'가 '부질 없다'는 공허함이지 않은가? 만약 그들의 연주가 그토록 창의적이라면 우리는 어째서 그러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란 말인가? 결국은 그것이 이미 주어져 변형될 수 없는 개념적 객관을 유명론자가 되어 못본 체하며 오직 복수의 경험적 현상만이 존재하는 듯 보이도록 만드는 층위에 머물기 때문이지 않은가? 혹은, 객관이 악보화된 음의 개념적 배열을 이룬다고 할 때 주관은 '객관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다양한 주관적-경험적 해석의 층위가 있을 뿐'이라고 버클리와 같이 비판할 때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반과학적 혹은 흔히 과학과 대비되어 상상력이라 평가절하되어 불리는 영역을 가리키지 않는가? 그것이 수많은 다양한 연주자들의 존재가 뜻하는 바이지 않은가? 반면, 들뢰즈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관점들의 문제라는 것이 이미 음악을 가상적인 것이 아닌 현실적인 것으로 이해한 후에나 얻어진다는 사실이지 않은가? 달리 말하면, 들뢰즈적 음악이라 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완성되지 않은 자연이 직접적으로 의식과 구분되지 않게 되는 층위에 위치하지 않는가? 그것이 바로 화성악에 이르지 않은 채 반복적 패턴의 모습으로 비트가 조합되는 현상의 정체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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