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첫번째 영상은 마오리족 학생들이 은퇴하는 교사에게 예를 표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만약 저것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안무'라고 부른다면 저 영상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집단성이 최고조로 표출될 때 안무가 띄게 되는 양상이다. 즉, 아래에서 드러나는 것은 원시 주술 사회에서 아직 예술과 삶이 서로 구분되지 않았을 때 육체의 움직임이 달성했던 집단성의 현시다. 물론, 이것이 '군무'라 알려진 것의 핵심이다. 이로부터 한 가지 알게 되는 것은 '어반 댄스'가 한편으로 원시 주술 사회의 '군무'를 차용하는 듯하지만 실은 전혀 다른 종류의 댄스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즉, 기본적으로 어반 댄스는 단 한 명의 댄서만으로도 공연이 가능한 반면, 아래의 춤은 혼자서 출 경우 의미를 잃게 된다. 달리 말하면, 아래 영상에 담긴 군무는 한 명이 공연하는 것으로는 의도된 효과--집단적 일체감의 고취--를 전혀 달성하지 못하는 특징을 지닌다. 한 예로, 아래 안무에는 정확히 수신자--은퇴하는 교사--가 있으며, 그 청자는 춤을 추는 집단 밖에 물리적으로 존재한다. 이는 수신자가 집단의 일부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그 반대다. 춤의 수신자는 물리적으로 춤을 추는 집단의 밖에 위치함으로써 정확히 춤추는 자들과 동일한 집단에 속하게 된다. (전근대 사회에서 강력한 리더가 수행하는 역할을 생각해보라. 거기서 리더는 재현의 논리, 예컨대, 민주주의 대의제 하에서 국회의원 혹은 대통령이 표상하는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 전근대 사회에서 리더는, 그 어떤 개념적 간극 혹은 표상의 논리도 없이, 물리적으로 집단과 하나다. 그러한 이유로 전근대 사회에서 리더와 집단은 이른바 '폭력'으로 맺어졌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폭력'이 단순히 근대인이 생각하는 부정적 관점에서 여겨질 필요는 없다. 예컨대, 여기서 폭력은 '존재'이며, '있음' 그 자체를 의미할 뿐이다. 하이데거적 전근대성을 생각해보라. 그 안에는 존재의 드러남-숨음이라는 간극이 있지만 그럼에도 그 특유의 전근대적-농촌적 감수성을 지울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아직도 여전히 하이데거의 시골 농부 감수성이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겪는 근대성의 한계에 대한 대안으로 여겨지는 측면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보라. 그러나 동시에 하이데거가 나치즘을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여긴 적이 있음을 또한 떠올려보라.) 이는 전근대 사회의 군무가 자기 동일적 시각의 작동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얻어지는 특징이다.
따라서 아래 영상에서 집단에 속해 춤을 추는 자들이 거울 속 자기 이미지를 수신자로 삼아 춤을 추고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즉, 이들은 그들이 경의를 표하는 물리적 존재에게 자신의 물리적 현시를 증명하고자 춤을 추는 것이지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비물질적 존재를 증명하고자 춤을 추고 있지 않다. (하지만 아래 영상에서 첫째 열 왼쪽 끝에 있는 학생이 격렬하게 춤을 시작하려 하다 카메라를 의식하는 눈빛을 잠깐 던지는 것은 사실 큰 옥에 티이며 전근대성이 근대적 시각성으로 변형-와해되는 순간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즉, 그의 그 누구보다 격렬한 춤 동작은 그가 품고 있는 은퇴하는 교사에 대한 경의의 크기가 아니라 그의 카메라에 대한 사랑의 크기를 증명한다.) 이렇듯 미학적으로 조율된 시각 자체가 실은 중요하지 않은 이유로 아래 군무에서 흔히 말하는 '칼 같이' 동일화된 움직임은 의외로 요점이 아니다. (따라서 사실 여기서 '미학'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요컨대 미학의 핵심이라 여겨지는 시각은 의외로 항상 미학 이상 혹은 미학 이하이다. 왜냐하면 시각성이 전제하는 '존재'가 사실은 '없음' 혹은 '무'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헤겔이 칸트의 미를 주관적이라 말하는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집단이 만들어내는 비시각적-물리적 움직임 자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보다 중요하는 것은 저들이 만들어내는 집단적 '소리'에 있다. 즉, 저들은 아래 군무에서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소리를 내지름으로써 증명하려 한다. 이것이 근대적 시각과 전근대적 소리의 대립이다. 여기서 어반 댄스가 만들어내는 것이 정확히 비물리적 시각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시각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언급할 것은 아래 두번째 및 세번째 링크에서 보이는 (온갖 댄스 경연대회에서 높은 순위에 거의 항상 오르는) '브라더후드'라는 팀의 댄스가 사실은 '어반 댄스'적 요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저들의 집단무는 기술적으로는 최상에 속한다. 하지만, 의외로 시각적 감흥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지위지지 않고 남는다. 왜 그럴까? 저들이 개념화하지 못하는 것이 원시 주술 사회의 군무와 어반 댄스적 군무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저들의 군무는 '칼 같다.' 그런 의미에서 시각성에 의지한다. 하지만 저들의 '칼 같은 군무'는 결국 전근대적 이야기성, 서사성으로 환원되며 시각의 비물리성을 물리성으로 되돌린다. 예컨대, 수십 명의 인원을 집단적으로 동원한다는 점은 물론이고, 저들의 댄스가 재현하고자 하는 고등학교 학창 생활적 감수성을 보라. 결국 남겨지는 것은 뻔한 물리적 현실이다. 결과적으로 브라더후드의 공연이 거의 항상 뮤지컬 공연의 층위로 옮겨가고자 한다는 점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저들은 어반 댄서라기보다 뮤지컬 댄서이며, 어떤 면에서 저들의 댄스는 집단 간의 스포츠 경기가 있을 때 자기가 속한 집단의 사기를 돋우는 '치어리딩'에 더 가깝다. 그런 이유로 저들의 안무를 시각적 이유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만약 저들의 안무를 즐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저들의 안무가 전근대적 집단 감수성을 뮤지컬적으로 돋우기 때문일 것이지, 시각적 이유 때문은 아닐 것이다.
* 두번째 및 세번째 영상은 링크다. 링크를 클릭하면 유튜브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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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Farewell Haka
2. Brotherhood at Body Rock Competition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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