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

Cookies

by spiral 2017. 5. 22.

아래와 같이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안무를 꾸밀 때 가장 큰 어려움은 집단성과 개인성의 조화 및 대조를 확보하기 쉽지 않다는 데 있다. 동시에 30여명의 인원을 무대 위에 올리는 것은 집단성을 예술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뒤샹이 남성용 소변기를, 사진으로 찍거나 그림으로 그리는 대신, 물리적으로 미술관에 직접 가져다 놓았던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집단성을 현시하고자 하는 일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즉, 개별 안무가가 집단의 한 일원으로서 담아내고자 하는 대표성이 직접적으로 동원된 육체적 잡다함에 묻혀 빛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저러한 안무의 성공은 개별 혹은 소규모 안무가 이루어질 때 어떻게 나머지 잡다함을 추상화하여 배경으로 밀어내는 동시에 여전히 배경 자체가 살아 있도록, 즉, 단순히 살해당한 배경이 아니도록 만들 것이냐에 달렸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다시 말하면, 아래와 같은 안무를 볼 때 가장 난감한 지점은 인간의 시각이 중심된 하나의 초점을 갖고자 하는 것에 비해 저 거대한 물리적 집단성이 그러한 시각적 욕망을 분산시키며 각각의 움직임을 무의미한 물리적 총합으로 용해시켜버린다는 데 있다.) 사실 이 점에 있어 아래 안무가 해당 문제를 완전히 해소하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즉, 아래 영상의 안무는 고아원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의 현실을 물리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개별 인간이 고아화되는 순간을 압도하여 지워버리는 측면을 지닌다. 달리 말해, 아래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은 인간의 보편적 고아로서의 지위, 혹은 거꾸로, 고아의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지위,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회로부터 소외된 고아가 아닌 고아로서의 인간 혹은 인간으로서의 고아다. 쉽게 말하면, 각각의 장면에서 여러 방식으로 의미를 부여하고자 무척 노력했지만, 구태여 저렇게 많은 인원이 실제로 무대 위로 동원되어야만 하는 이유를 몇몇 예외적 장면을 제외하고서는 발견하기가 사실 그렇게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래 영상을 볼 만하게 만드는 요소는 저들이 도구를 시각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에 있다. 그리고 그것이 저들의 물량 공세를 정당화시켜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예컨대, 이들이 담요를 이용해 개별 고아들의 총합을 추상화하며 육체적 층위를 가리는 장면을 보라. 그와 동시에 담요로 만들어진 시각적 장막으로부터 개별 고아들을 태동시키며 또 다시 잡아먹는 방식을 보라. 그러한 개별과 집단의 사이의 대조 혹은 긴장이 없었다면 아마 아래 안무는 그저 전근대의 거대한 원시 주술 행위와 같이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