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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한번도 가본적 없었던, 인천 어딘가 교외에 위치한, 한 군사 훈련장에서 아직 현역으로 복무하고 있는 옛 선후배 장교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며 반가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이미 모든 것은 변하였고 그리하여 다시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뒤숭숭하고 어수선한 마음에 시달리게 된 것은 정작 집에 돌아오고도 이미 하루가 더 지난 시점에서 벌어진 뜬금 없는 일이었다. 순간, 그곳에서 보냈던 2박3일간의 일정 중에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밥을 먹고 잠을 자는 물리적 작용-반작용 이외에 '자율참여형 훈련'이라는 구호가 명시하는 의미라고는 티끌 만큼도 없었다고 소리 높여 항변을 하고 싶었으나 실은 온전한 민간인의 삶도 그렇다고 군인의 것도 아닌 내 삶이 그들이 내세운 텅빈 군사적-민간인적 구호 못지 않게 무의미하고 공허하여 그 어떤 투덜거림도 도저히 내놓을 수가 없었다.
때때로 토니 해리슨(Tony Harrison)의 시를 읽는 일은 감정적 고역으로 다가온다. 정해진 시간이 되어 독회 모임에 내려가기 직전 2층 열람실에 앉아 읽은 그의 시 "북 엔즈"(Book Ends)는, 억지로 1층 세미나실에 내 몸을 옮겨 놓은 후에도, 도통 아무 말을 꺼내지 못하도록 나를 휘감으며 짓누르고 있었다. 무서운 마음을 불러일으켜 지금껏 품어온 모든 단단한 마음가짐들을 이토록 심란하게 찢어 놓는 시를 읽는 일이 이성의 공적 사용을 사고하는 학자 입장에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소리 높여 항변을 하고 싶었으나 긴 침묵 후에 세미나에 참석한 사람들을 앞에 두고 내 입에서 나온 첫마디 말은 그저 '시가 너무 우울해'라는 여전히 짓눌린 정신을 바로 세우지 못하였으며 상투적이고 바보 같은 소리였다.
모임 별의 곡 중 이 곡에 가장 애착을 느낀다. 추스릴 수 없는 마음 속 파국적 경험이 다루어지되 그것이 견딜 수 없는 것에 대한 직설적-외설적 화풀이나 고함 혹은 울음이 아니기에 좋아한다. 이미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울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지만 또한 더 이상 울고 있지만은 않은, 혹은, 이미 사치스러운 감상적 울음 따위 잊은지 오래전 일이지만 또한 더 이상 울지 않고 있지만은 않은, 상반된 것들이 눈 앞의 대립물에게 자리를 내주며 자신을 변형시키는 모습 말이다. 그러한 상반됨은, 첫째로는, 가사 내부에서 '잠들기 전'과 '잠든 후의 꿈' 사이의 대립으로, 두번째로는, 잠들기 전의 "장님이 된 괴물처럼" 그리하여 "이제는 약간은 무서운" 가사와 곡의 시작부터 이미 사랑에 빠져 있는 마음으로 인해 고양된 심장 박동의 맥박과 호흡을 닮게 된 비트와 리듬이 묘사하는 꿈결 같은 배경음 사이의 대립을 통해, 세번째로는, 남녀간의 같은 듯 다른 두 목소리의 공존과 대립을 통해 반복된다. 이는 주관과 탈주관이 서로 엮어지고 맞물리며 꼬이고 풀리는, 주류 대중 음악의 영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흥미로운 광경을 이룬다. 예컨대, "너와 내가 아무 것도 입지 않고 잠에서 깨어 일어나"에서부터 꾸준히 시작하여 "전국 노래자랑에 출전하면 어떤 노래를 부를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를 거쳐 "서로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을 마치 단 한번도 이야기한 적 없다는 듯 재미있게 이야기하는"에 이르는 순간 배경음의 낭만적 분위기는 최고조에 오르지만 그와 함께 실은 "이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거의 없는 것 같아"라는 최초 곡의 시작과 동시에 도입되었던 손쓸 수 없는 현실적 무능력에 기반한 불길함 또한 은밀하게 커진다. 그에 바로 뒤따라 "몇 살쯤에 죽고 싶은지를 물어보고"라는 이 곡에서 유일하게 반복되는 후렴구가 그때까지 천천히 발전-진행되어 왔던 낭만적 소박함에 관한 이야기를 최고조에 올리며 '잠들기 전'의 현실을 봉합 및 종료시키기 위해 나오지만 이때 가사가 언급하는 '죽음'은 둘이 함께 있어 현실적으로 만족스러운 에로스적 사랑을 담아내는 동시에 모든 것의 끝으로서 사랑이 기반한 타나토스적 죽음 충동을 말 그대로 반복하며 그 모든 봉합을 도로 찢어놓는다. 결과적으로 이 곡은 흔하디 흔한 주류 대중 음악 속 웬만한 사랑 노래보다 더 낭만적이지만 '총 맞은 것 같은' 따위의 외설적 감상주의가 사이렌의 달콤한 목소리로 우리를 꾀어오는 유혹을 회피하며, 동시에 파국적 사랑의 위기로부터 출발하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낭만적 전망을 손쉽게 폐기처분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이 곡의 성취가 3년 여 전에 이미 한번 올렸던 곡을 구태여 지금 다시 한번 더 반복하여 내 자신의 죽음 충동과 함께 이곳에 내놓는 이유다. (이러한 국면을 포착하지 못하고서야 오늘날 대안적 의미에서 '인디 음악'이라는 용어 따위 '주류 음악'과 대조되는 의미에서 사용할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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