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에서 하는 강의

spiral 2024. 6. 24. 11:45

영어는 한국인의 영혼을 울리지 못한다. 영어로 강의를 할 때면 학생들의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 한국의 대학은 영어 강의를 금과옥조나 되는 것처럼 여기지만 실은 빛 좋은 개살구에 가깝다. 내가 느끼기에 학생들은 영어 강의가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아 듣고 있지 않거나 혹은 능력이 되지 않아 듣고 있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다. 나도 피곤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한다. 물론 요점은 다 전달한다. 그러나 오히려 요점에서 벗어나는 말이 줄어들게 되는 것이 문제다. 언어란 것은 요점에서 벗어나야 흥미롭고 재미있는 법이다. 인문학적 상상력이란 것은 본질에 닿고자 하나 실패하며 계속해서 우여곡절 속에 머무는 데 그 핵심이 있다. 인문학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실은 수학도 마찬가지다. 대수학은 기본적으로 동어반복이다. 다만 동어반복을 어떻게 창의적으로 하느냐에 그 묘미가 있다. 

기말시험을 보고 난 후 학생 하나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의 요지는 간단했다. 한 학기 동안 나에게서 많이 배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사실 이 친구는 전혀 모범생이 아니다. 시험도 잘 못봤고, 늘 지각을 했다. 그러나 멍청하거나 불량한 학생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은 아니었다. 난 그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고 느꼈다. 사실 난 이 친구가 글쓰기를 하는 것을 보며 이 친구에게 형이상학적 특징이 있다고 느꼈더랬다. 그가 말하길 대학 입학 후 방황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 마음을 굳혀 의대에 다시 한번 도전해보고자 한다고 했다. 그는 이공대생이다.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이공대 학생들이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하지만 난 조금 다르게 느낀다. 난 근래 인문계 학생들에게 '놈팽이' 기질이 있다고 느낀다.

이번 학기 가르친 학급 중에는 이공대 학생들이 모인 학급과 인문대 학생들이 모인 학급이 있었다. 이 두 집단은 대조적이었다. 이공대 학생들은 늘 조용했다. 동료간의 유대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집단성이 중심에 있지 않았다. 처음에 난 이래서 어떻게 수업을 이끌고 갈 수 있으려나 싶었다. 뭔가 근본적으로 수업에 동기부여가 되지 않은 모습들이었다. 반대로 인문대 학생들은 늘 소란스러웠고 모여 노는 데 열심인 모습이었다. 처음에 난 활기차서 좋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들의 집단성이 그들로 하여금 학업이라는 본질에서 벗어나도록 만드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식이었다: '너도 시험 망쳤어? 나도 그래, 그러니 우리 모두 다 못해도 괜찮은 거야.' 난 근본적으로 이들에게서 지적 호기심이나 새로운 것을 알고자 하는 열망을 크게 느낄 수 없었다. 아주 소수만이, 집단에서 소외되어 혼자 노는 아주 소수이 학생만이 내 강의에 진심으로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집단의 중심에 있지 않았다. 난 지적 공동체가 만들어지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반면 처음의 우려와 달리 학기 말에 이르자 이공대 학생들이 모인 학급의 학생 중에는 다음 학기에 내 수업을 또 들을 수 있느냐고 물어오는 학생들이 있었다. 이공대생들과 나의 관계는 원만했다. 서로간에 신뢰가 있었고 지적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이 공유되고 있었다. 아마도 색다른 영어 선생을 만나봐서 감흥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고등학교 때까지 학교에서 만나온 영어 선생들은 분명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나보다는 모범적인 사람이었을 것이다. 난 모범적인 사람이 아니다. 영어도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가르칠 뿐 아니라 수업 중에 수학과 과학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흥미로운 것은 내가 수학과 물리학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난 후 이들 이공대생들이 나에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존중심을 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영어 선생은 영어로 존중심을 얻지 못한다. 영혼을 울리는 것은 영어가 아니다. 

이공대생 학급과는 대조적으로 인문대생들이 모인 강의실에서 난 지적 열정이 느껴지지 않는 학생들로부터 존중을 얻기 위해 군대와 같은 규율을 도입해야했다. 이들 앞에서 난 도저히 수학과 물리학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었다. 훨씬 더 쉬운 이야기를 해도 이들의 반응은 이미 그다지 지적으로 자극을 받은 느낌이 아니었던 터였다. 소귀에 경을 읽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적 대화가 가로막힌 느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딴짓을 하는 학생들이었다. 이런 식이다: 교실에서 핸드폰을 손에 잡는 순간 퇴장 요청을 받을 것이라는 방침을 통보한 후 얼마 되지 않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학생이 나와 바로 나가달라고 요구했다. 사실 해당 학생 때문에 도입한 정책이었다. 딱 걸린 것이다. 어줍잖은 변명을 해왔다. 한번만 봐달라는 식으로 나오길래 마지막 경고로 끝냈다. 그 후 학급 전체가 나에게 존중심을 표하기 시작했다. 인문계 학급에서 통용되는 것은 지적 권위가 아니라 침팬지 사회의 상하관계에 기반한 권위였다. 몽클레어 반팔 티셔츠를 입으며 팔에 문신이 가득한 이 복학생은 그 후로 학기가 끝날 때까지 나를 '알파 메일'(Alpha male)로 여기는 행동을 보였다. 난 필요하다면 내가 합법적으로 지닌 권위를 사용하는 데 거리낌을 느끼지 않는다. 사실 난 군시절 장교로 보내며 내 체질에 맞는 곳에 와 있다고 느꼈다. 물론 난 아주 내적인 사람이다. 근본적으로 사람 얼굴 쳐다보는 것도 피곤하다고 느낀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고 느낀다. 난 제로(zero)와 같은 사람이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과 같다. 그러나 앎에 대한 자발적 존중심을 표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지적 존중심이 없는 곳에서는 필요하다면 침팬지적 권위를 사용해야한다. 하나(the One)는 제로로부터 태어난다.

영어 강의가 행해지는 곳에서는 이러한 종류의 피곤한 일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다. 모국어가 퇴거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회색 지대의 삶이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지적 존중심도, 침팬지 사회의 권위에 대한 감수성도 모두 사라진다. 그저 멍해진다. 소수의 모범적 학생들만이 의무감에 수업에 집중한다. 대중은 없다. 엘리트만이 남는다. 그러나 큰 영감과 감흥은 없는 엘리트 그룹이다. 그러다 학기말 마지막 순간 내가 문학 텍스트를 하나 소개한 후 그 내용을 한국어로 이해시켜주자 최초로 학생들의 마음에 한 줄기 감흥의 빛이 스며드는 모습이었다. 그제서야 그들은 내게 집중했고 내 말에 존중심을 표해왔다. 난 그때 그들의 달라진 눈빛을 잊지 못한다. 그때 느꼈다. 한국에서 한국 학생을 대상으로 영어 강의는 해서는 안될 일이라고 말이다. 영어 강의는 지적 생명의 불씨를 꺼트리는 일에 불과하다. 외국인 학생이 있는 학급에선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을 소외시키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영어강의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