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부족주의 혹은 '젊은이'의 정치
그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가치가 없는 '40대 대통령 후보'라는 자의 언행은 끔찍하다. 그는 반지성과 혐오의 아이콘이다. 20대라면 치기의 발로라고 못본척 넘어갈 수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이 40을 먹고 한 나라의 대통령 선거에 나온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그의 부도덕성과 폭력성을 지적한다고 해서 그를 지지하는 자들이 딱히 그에게서 등을 돌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데 있다. 사실은 애당초 그가 도덕과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에 지지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 그들이 보기에 세상은 타락한 곳이다. 세상이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곳, 사기가 횡행하는 곳이라면, 내가 해야할 일은 똑같이 세상을 사기쳐서 등쳐먹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그들의 마음에 쏙 드는 대리인이 바로 그다. 예컨대, 그들 사이에서 '하버드'는 도덕성과 학식의 지표가 아니다. 그저 가장 힘이 센 나라의 가장 힘 센 집단을 나타내는 상징과 같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게임의 세계에서 그러하듯, '필살기'가 하나라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하버드'는 그저 그 정도의 의미다. '하버드'는 일종의 게임 '아이템'이다.
사실 그에게서는 오랜 시간 대기업 취직에 실패한 자와 같은 면모가 있다. 직장생활을 하며 사회에 기여해본 적 없는 그는 젊은이로서 구직활동을 정계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12년 동안 낙선하며 취업 시장에서 실패해왔다. 지역적 특성이 강한 곳에 출마해 일어난 일이 아닌 이상 정치인으로서 경쟁력이 없어 선택되지 못했다는 관점에서 퇴출되는 게 맞다. 그러나 그와 동일한 세계관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 그의 이러한 과정은 자신의 구직 실패 경험을 투사하여 공감하기에 좋은 소재가 된다. 기성 세대들이 전부 해처먹고 있어서 젊은이들이 취직이 안되듯 정계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기 믿기에 좋은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힘당 내부 지배층이 대구경북 의석이나 비례대표를 통해 의원직을 거저먹는 방식 등을 보면 꼭 틀린 말만은 아니다. 엘리트 부모 밑에서 자란 그가 마치 '흙수저'인 것처럼 느껴지는 바탕에는 일종의 언더독 서사가 있다.
언더독 서사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그러나 그는 결국 승리했다'라는 엔딩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의 언더독 서사는 사실상 편법적 조작에 기반해 완성됐다. 국힘당의 대표와 자신이 만든 당의 의원이 되기는 했지만 그의 뒤에는 명태균이라는 여론조작 부정행위자가 있었다. 구직자가 능력이 없어서 구직 활동에 실패한 것을 결국 사기를 통해서 만회한 셈이다. 이는 사기를 쳐서라도 내 욕망을 달성하겠다는 것 자체가 정치의 목적이 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대체 무엇이 하고 싶어서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인지 그에게서 아무런 국가적, 정책적 비전도 찾아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여성 혐오, 기성 세대 혐오,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 외국인에 대한 혐오 등은 정책이 아니다. 국가 정책이 아니라 분노와 원한에 기반한 사적 욕망의 구현에 불과하다. 이런 사람이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위치에 가게 될 때 하게 되는 일이 바로 '군림'이다.
그가 행하는 정치는 부족주의적이다. 인터넷 커뮤니티 내 '팔로워'들을 이끄는 '부족의 영도자' 같은 행태를 보인다. 근래 그들이 '준천지'라 묘사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기서 그의 정치가 전문화된 현대 사회의 시스템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이미 말했듯 그는 사회에서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렇게 40년을 보냈다. 이는 지금까지 전문성 없이 부족을 이끄는 '컬트 지도자' 역할만 해왔다는 뜻과 같다. 한 예로, 그를 만나본 사람들이 증언하듯, 그는 경제 정책의 전문성을 폄훼한다. 근래 정치계를 그토록 난리법석으로 만들었던 '법기술'조차 지니고 있지 않다. 그가 젊은이들을 선동하는 위험한 인물로 부상하게 된 바탕에는 전문가 사회를 직업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그의 이력이 있다. 비전문가로서의 특성은, 좋게 말하면, 관료주의의 답답함을 깨는 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비전문가적 특성은 파시즘의 근간이기도 하다. 그가 한국의 트럼프라 불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트럼피즘 또한 인터넷 컬트 문화 혹은 부족 문화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 인터넷이 등장하던 초창기와 달리 작금의 인터넷 문화는 상당 부분 부족주의적이다. 동시에 인터넷 부족주의는 익명성과 규모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 부족주의와 달리, 근간에서부터 파시즘적이다. '대중'의 익명성이 '부족'의 끈적한 감정을 지니게 될 때 파시즘이 나올 수 있다.
40살은 애매한 나이다. 더 이상 젊지도 않지만 아직 늙었다고 말할 나이도 아니다. 이 나이의 특성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새로운 것에 대한 학습력이 상당 부분 상실된 상태라는 데 있다. '난 아직 최신이야'라고 생각할 만큼의 건강과 사회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미 내부에서부터 건강은 침식되어 가고 있으며, 새롭게 등장하는 지식, 문화, 기술은 이미 자기 것과 같이 친밀하게 느껴지지 않는 상태에 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전문가의 도움을 통한 학습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제가 하나 있다. 나이는 40이 되었지만 지금까지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학습해왔기에 앞으로도, 완벽하지는 못하겠지만, 변화하는 세계에 민감하게 반응해 변화하겠다는 의지가 그것이다. 그러나 난 그 자에게서 이러한 면모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저 권모술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민첩함이 느껴질 뿐이다. 난 그가 이미 동시대적 세계 질서에서 뒤처진 사람일 것이라 추정한다. 전문성은 모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전문성을 단 한번도 달성하지 못한 사람은 또 다른 함점에 빠진다. 그 함정의 전통적 이름이 '꼰대'다. 시간은 계속 지나갈 것이다. 전문가적 지식에 대한 학습력은 지니고 있지 않으면서 술수와 수작만을 부릴 줄 아는 사람은 10년 뒤 혹은 20년 뒤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인가? 그게 우리가 지금 국힘 지배층에게서 발견하는 노쇠한 꼰대의 모습이지 않는가?
전문가 사회의 약점은 근본적으로 젊은이의 패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라는 데 있다. 전문가 사회의 다른 이름은 관료주의 사회다. 오늘날 사회가 뜬구름 잡듯 '젊은 세대'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된 배경에는 바로 전문가 사회가 있다. 젊은이가 근본적으로 필요한 때는 전쟁, 재난, 재해 등이 일어난 상황 혹은 혁명을 일으켜야하는 상황 정도에 국한된다. 전문가 사회는 이 모든 재난과 재해를 관리하여 사전에 방지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전문가 사회는 젊은이의 패기를 관리 및 감독하는 사회와 같다. 감시 사회라는 주제가 이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전문가 사회의 한계를 비판하는 일은 신중해야한다. 젊은이의 패기가 허락되지 않는 현대 사회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젊은이'를 우상숭배하게 되는 현상이 벌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디어에서 젊은이를 다루는 방식은 오늘날 새롭게 등장한 특별한 젊은이에 관한 것이라 하기 어렵다.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는 항상 문제적이었다. 노인이 사고 치는 내용의 서사 작품을 본 적 있는가? 차이는 오늘날은 '젊은이'를 우상숭배하게 되었다는 데 있다. '젊은이'를 우상으로서 숭배하게 되면 이른바 젊은 신체를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 혐오와 폭력의 언어가 자라기 시작할 때 그 본질을 보지 못한 채 '우와, 젊은이의 패기!'라며 승인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우리가 지금 보는 '40대 대통령 후보'는 그 결과다. '40대 대통령 후보'는 자신을 부족의 '아이돌'로서 마케팅하고 있다. 부족주의와 우상숭배, 주술과 미신의 세계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채 그와 함께 계속되고 있다.
* 사실 이른바 '40대 대선 후보'와 비슷한 나이의 정치인은 많다. 그러나 그들은 딱히 '젊은이'로 여겨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들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을 하기에 적합하다고 여겨졌기에 당선된 경우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젊은이'로서 우상숭배된 결과 의원직에 당선된 것이 아닐 경우 신체의 나이가 젊어도 딱히 젊은 정치인으로 마케팅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른바 '40대 대선 후보'는 다르다.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내가 대통령이 되겠다'는 개인의 욕망이 전면에 나선다. 그래서 '젊다'고 분류된다. 그러나 그 젊음은 그 어떤 공적 가치도 무시하는 독선적 자아에 기초하고 있다. '중2병'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중2병 환자가 국가를 운영하게 되면 국가는 사적 감정을 풀기 위한 도구가 될 가능성이 높다.